가부키 1
“하튼……, 배웅따위 필요없다니까.”
나리타 국제공항 체크인 카운터 앞에서 호오 카린은 징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인솔하는 척 따윈 하기 싫었거든. 그래도 학교에서 똑바로 출국하는거 확인해 달라고 부탁을 받았단 말야.”
세토 미츠키도 마찬가지로 징한 한숨을 토해냈다.
뉴 레전드의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카린은 해외로 떠나게 되었다.
행선지는 네덜란드와 독일, 노르웨이, 스페인, 영국 등 유럽 여러 국가를 둘러보게 된다.
각국 학교에 단기 유학을 가 현지 덴온부와 교류를 돈독히 하고 견문을 넓히는 것이 목적이다.
언젠가는 카린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프로 DJ로서 본격적인 DJ 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면 당연히 세계 각국을 바쁘게 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때를 위한 예행연습. 경험을 쌓으면서 도를 닦는다는 측면도 있다.
각국에서는 현지 학생들과 STACKBATTLE을 하게 되고, 거기에 더해 유서 깊은 파티와 대형 페스티벌에도 게스트로 참가할 예정이다.
카린에게 있어서 아직 만나지 못한 강호와 벌일 배틀은 오히려 환영할 만하다. 카린은 평소에는 학교에서 내리는 지시를 잘 따르지 않지만, 여기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튼…… 코흘리개도 아니고, 혼자서 갈 수 있다니까 그러네.”
카린은 혀를 차고서, 이번엔 미츠키 뒤에 모여든 얼굴들을 노려본다.
“거기다 늬들은 또 왜 왔냐?”
아키바 에어리어 소토칸다 문예 고등학교 덴온부, 히다카 레이나와 시노노메 카즈네, 카야노 후타바 세 사람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멋대로 찾아온 건 맞지만, 일부러 배웅까지 해 주겠다는데 투정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아하하……. 카린 씨가 단기유학으로 해외에 간다고 들었는데, 바래다주고 싶었거든. 그래서 언니에게 전화해서…….”
히다카 레이나는 도움을 청하듯 미츠키를 바라보았다.
“……그닥 숨길 일도 아니었으니까 출국 시간만 알려줬어.”
“흐응…….”
카린은 별안간 히죽히죽 웃었다.
“뭐.”
“아니, 이런 핑계로 사람을 써먹는구나, 싶어서.”
미츠키의 뺨에 반짝 붉은 기운이 스쳤다.
“됐으니까 얼른 체크인이나 해! 놓치지나 말고.”
“히~ 히~”
카린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체크인 카운터로 향했다.
“……잠깐만! 캐리어 까먹지 말고!”
미츠키 앞에 빨간 캐리어가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어? 아, 그거, 꼭 가져가야 하나?”
“학원과 뉴컴에서 제시한 유학 조건이잖아.”
카즈네의 귀가 쫑긋 움직였다.
“어, 거 뭐 새로운 장비랬던가 그거?”
미츠키는 희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예리하네. 그래도…… 뭐, 그래.”
미츠키는 캐리어를 열기 쉽게 바닥에 뉘어놓았다.
“기본적으로는 ID-J가 있으면, 전 세계 어디서나 플레이할 수 있긴 하지만, 익숙한 환경이 좋다고 생각하는 플레이어들도 있어. 쓰는 장비를 까다롭게 따지는 사람도 있고.”
거기까지 들은 카즈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 시제품이란 말이군요.”
“……역시 이해가 빠르네. 카린 전용으로 세팅한 DJ 유니트야. 원래 있던 제품을 돌려 쓴 거긴 한데, 이래저래 튜닝해서 부품도 업그레이드 해놨고, 캐리어에 들어갈 수 있도록 커스터마이즈 해 놓았어. 네트워크 커넥션 기능도 업그레이드해서 이거 한 대로 메타버스에서 이벤트도 열 수 있다고. 이걸 세계 각지에서 사용한 뒤에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도 업무의…….”
미츠키는 거기까지 말하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하필이면 장비를 제일 안 가리는 상대한테 맡기는 시점에서 애초에 틀려먹었다고 생각하기는 한데…….”
미츠키는 캐리어 측면에 손가락을 댄다. 그러더니 테이온 레귤러 멤버만 인식하는 지문 인증으로 자물쇠가 풀린다. 미츠키는 캐리어를 열었다.
“이것이 카린 전용 새 DJ 유닛…….”
무릎을 끌어안은 노랑머리 여자 아이가 들어 있었다.
“…………………….”
옆으로 누워 조그맣게 웅크린 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자고 있는 게 아니다. 눈이 휘둥그래졌고 눈동자가 흔들리고있었다. 뺨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얼어붙었다.
히다카 레이나만 빼고.
“어어어어엇?! 카린 씨의 새로운 DJ 유니트가 루키아 쨩이었어?!”
미츠키는 무릎에 힘이 빠질 뻔했다.
아방하고 순수한 추가타. 이런 동생한테 졌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꺾일 것 같다. 이젠 딴지 걸 기운도 바닥나버렸다.
카즈네가 대신 딴지를 걸어 미츠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럴 리 없잖아!”
후타바도 눈을 울먹거리며 떨고 있다.
“이, 이건…… 설마 유, 유괴?”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딴지를 걸 상대가 늘어난 카즈네는 매우 바빠졌다.
카운터 앞에서 돌아온 카린이 루키아가 든 여행가방을 가볍게 걷어찼다.
“또 밀항하려는게냐? 나를 범죄자로 만들지는 말라고.”
그 미츠키조차도 딴지를 걸 수 없었다.
‘또’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같은 심정이었지만 뭔가 건드리면 안될 것 같아서 잠자코 있었다.
마음을 가다듬은 미츠키가 루키아를 손으로 가리켰다.
“루키아! 도대체 넌…….”
그 다음 찰나 루키아는 미츠키의 손을 피해 여행용 가방에서 뛰어나왔다.
“앗?!”
깨닫고 보니, 루키아는 몇 미터 앞에서 네 발로 자세를 잡더니 털을 곤두세우고 위협하듯 송곳니를 드러낸다.
“그치만! 그치만! 카린은 잔뜩 배틀하러 가는거잖아?! 그런거 치사해! 루키아도 배틀하고 싶어! 마구 싸우고 싶어!!”
“떼 좀 쓰지마! 그런다고 갈 수 있는게 아니잖니!”
미츠키는 빈 캐리어를 보고 퍼뜩 깨닫는다.
“원래 있던 장비는 어디 뒀어?!”
“거치적거려서 버렸어!”
“루키아아아아앗!!”
미츠키의 고함 소리에 루키아는 순식간에 플로어 너머로 달려간다. 미츠키가 쫓아가려니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대…… 대단하네요.”
눈이 휘둥그레진 후타바에게, 카즈네는 어색한 웃음으로 답했다.
“여러 의미에서 말야…….”
크흠, 하고 헛기침하자 미츠키는 여행가방을 닫고, 카린과 마주보았다.
“……찾아내면 부쳐줄게.”
“뭐, 괜찮아.”
“당신이 괜찮대도 다른 사람이 안 괜찮거든!”
카린은 의욕 없어 보이는 얼굴로 귀를 후빈다.
“그래, 나 없는 동안 집 잘 보고.”
미츠키는 싸늘한 시선으로 카린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없는 쪽이 더 평화로워.”
“그럴지도.”
히죽 웃고서 카린은 뒤돌아선다.
“그럼 다녀온다.”
출국 게이트로 멀어지는 뒷모습을 향해 레이나는 말했다.
“잘 다녀오세요! 카린 씨!”
카린은 등을 돌린 채 한 손을 들어 대답했다.
카린이 출국 게이트 안으로 사라진 것을 보고, 세토 미츠키는 뒤돌아보았다. 그러자 그곳엔 히다카 레이나의 시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
“어, 그게…….”
서로를 바라본 채로, 우뚝 서 있었다.
뭔가 말이라도 꺼내고 싶지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는 그런 분위기였다.
뉴 레전드 직후에는 행사 여파와 파티 분위기로 말을 붙인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날을 잡아서 냉정하게 마주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윽.”
“……으.”
침묵과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서로 눈을 돌린다.
참으로 어색하다.
하지만, 둘 다 자리를 뜨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런 답답한 분위기를, 즐기고 있는 여자 한 명.
조, 좋았어어어어어어어!!!
시노노메 카즈네였다.
걱정스럽게 두 사람을 바라보는 얼굴 뒤로는 사실 몸부림치고 있다.
이거야 이거! 이거 보려고 일부러 나리타까지 왔다고!!
서로 좋아하면서 고백 못하는 느낌?!
그게 미소녀 둘이서, 그게 또 피를 나눈 자매가!
으아 진짜! 종교화(宗教画)로 만들어서 스테인드 글래스에 담아버리고 싶을 정도야!
하아아악!
이 공기! 못 참겠다!
습~하~ 습~하~!
그 자리에서 풍겨오는 분위기를 온 힘을 다해 만끽하고 있는 카즈네는 옆에서 후타바가 도움을 청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어, 어쩌죠……?!’
이건 레이나와 미츠키가 이야기할 절호의 기회다. 후타바 딴에는 ‘어떻게든 해주고 싶어, 어떻게든 해야 해’하며 혼자서 초조해 하고 있었다.
‘분명 카즈네 쨩이 어떻게든 해 주실거야.’고 생각했건만, 의지하던 카즈네가 어째서인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 이렇게 되면……!’
“저…… 저기…….”
갑자기 후타바가 수업시간처럼 손을 들었다.
“후타바?”
“후타바 쨩?”
“……무슨 일일까?”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을 뿐, 후타바는 식은땀을 흘렸다.
“어, 그게……, 제, 제가……, 그…….”
‘아무것도 아녜요.’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아, 안돼! 힘내자! 나!’
“그, 공항에는 맛있는 가게 같은 게 있는 것 같던데요. 괜찮으시면, 다, 다같이…… 그…….”
열심히 말하다보니 점점 눈물이 핑 돌기 시작하려는 바로 그때
“좋다!”
하고 카즈네가 거들었다. 이제 와서.
“레이나도 괜찮지?”
“으, 응. 물론 그렇지만……”
“세토 씨도 꼭 함께 가 주시겠어요?”
카즈네가 권유하자 레이나의 얼굴이 확 밝아진다. 하지만 미츠키는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그래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 아키바 덴온부 멤버들 사이에, 내가 끼면…….”
허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있다.
카즈네는 마음속으로는 기절하면서도 점잖은 얼굴로 부드럽게 설득한다.
“저희는 음악은 아직 지식도 경험도 모자란데…… 시부야 테이온 멤버인 세토 미츠키 씨가 여러모로 알려 주셨으면 좋겠는걸요. 어떻게든 도움을 구하고 싶으니까…….”
기도하듯 부탁하는 카즈네에 미츠키는 마지못해 하는 몸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쩔수 없네. 음악을 좀 묻고싶단거지. 그런 것쯤은…….”
그후 공항 안에 있는 레스토랑에 들어가 네 명이서 밥을 먹었다. 어색하게나마 띄엄띄엄 말을 주고받는 자매를 보며 카즈네와 후타바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기뻐하는 레이나와 쑥스러워하는 미츠키, 카즈네와 후타바 두 사람도 얼굴을 마주보고 웃음짓는다.
그리고 눈빛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정도면 또 다른 곳에도 데려가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가자고 해 볼까요? 2차.’
‘그래보자.’
‘이번에는 디저트 가게로!’
카즈네는 문득 생각났다는 몸짓으로 말을 꺼냈다.
“저, 모처럼이니, 이 다음에 말인데요……”
“미아 안내 방송입니다.”
안내 방송이 카즈네의 말을 끊으며 흘러나왔다
“타이가 루키아 양의 어머니 미츠키 씨.”
“커흡……?!”
미츠키는 마시던 홍차에 한껏 사레가 들렸다.
“루키아 양이 미아 보호소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서 가까운 담당자를…….”
“이…… 바보가!!”
미츠키는 얼굴을 붉히며 힘차게 일어선다.
“나는 저 바보 꺼내러 가 봐야 하니까 먼저 가 볼게. 사과하는 뜻에서 여기는 내가 계산하지.”
계산서를 집어들고 화난 얼굴로 계산대를 향해 갔다.
남겨진 아키바 세 사람은 멍하니 그 뒷모습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푸훗.”
레이나가 웃음을 뿜었다. 덩달아 카즈네와 후타바도 웃기 시작한다.
“정말이지 뭐야?! 시부야에 테이온이란 곳은!”
“그쵸. 뭔가 이미지가 바뀔 것 같아요. 좋은 의미로!”
레이나도 눈물을 글썽일 정도로 웃었다.
“그래도 즐거워 보여서 다행이야, 언니.”
“그러게요. 조금 힘들어 보이기는 한데요.”
“그래도 이런 분위기라면 언제든 찾아가도 괜찮지 않을까요?”
후타바가 말하자, 레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왠지 말야……, 지금부터 즐거운 일이 많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분명…….”
레이나는 꿈을 꾸는 것처럼 웃어보였다.
그것은, 구름 한 점 없는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