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com Entertainment STACKBATTLE LEGEND, 뉴 레전드 예선 경기 당일이 되었다.

장소는 시부야 에어리어에 위치한 국립 요요기 콜로세움.

뉴 레전드 메인 이벤트 여기에서 개최될 예정이라, 지금은 준비가 한창이다.

DJ 부스나 사운드 시스템 세팅은 이미 끝났고, 지금은 아자부와 아키바 두 팀이 각자 기자재 체크를 하고 있다.

커다란 무대에 DJ 부스가 두 대 세워졌다.

오른쪽 부스에는 아자부가, 왼쪽은 아키바가 쓰게 된다.

이번 STACK 배틀은 양 팀이 동시에 플레이하는 리얼타임 형식으로 진행된다.

일반적으로 이런 리얼타임 형식은 플로어를 나누거나, 스피커에서 소리를 내지 않고 관객이 쓰는 헤드폰으로 직접 스트리밍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번에는 뉴컴 엔터테인먼트가 개발한 기술이 시범적으로 투입되었다.

공기 진동으로 소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닌, 행사장 안에 뿌려 놓은 특수 입자로 소리를 전달하는 기술이다.

어떤 소리를 들을지 이어폰 리시버로 선택하면 귀에 들리는 소리부터 몸을 흔드는 음압까지 재현해내는 방식이다.

하지만 예선에서는 회장에 손님을 들이지 않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이 기술을 체험할 사람은 관계자들뿐이다.

그 대신 인터넷으로 많은 시청자들이 배틀 시작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 한들 레이나 일행들처럼 DJ 관점에서 보면 플로어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분위기가 썩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것도 뉴컴 신제품이라던데.”

카즈네가 일회용 콘택트 렌즈 팩을 레이나와 후타바에게 건네 준다.

“콘택트 렌즈?”

“AR 콘택트 렌즈야. 렌즈가 망막에 영상을 쏴 주는 거래. 인터넷 스트리밍으로 시청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플로어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고.”

“굉장하다! 랜선 너머 사람들이 여기로 와주는거구나!”

“그렇게 보인다더래.”

둠칫거리는 레이나와는 다르게 후타바는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다.

“저 렌즈는 잘 못 껴서요…….”

“어? 그랬어?”

“네. 눈에 뭔가를 넣는다니……. 무섭잖아요.”

괜찮다고 설득하려는데 기자재 담당 직원이 찾아왔다.

“저기~ 아키바 분들이시죠? 이건 뭐죠……?”

그렇게 말하며 레이나가 가져온 기자재를 가리켰다.

“아, 이거 집에서 가져온 거예요! 쓰고 싶어서요!”

스태프는 난처해졌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연결할 수 있기는 한가……. 이거.”

“예에에에에에?!”

그런 실랑이를 아자부 쪽 DJ 부스에서 아키가 지켜본다.

‘뭐 때문에 저렇게 소란스럽지?’

아키는 조금 신경쓰이긴 했지만 어차피 별 일 아니라 생각하며 금새 흥미를 잃어버렸다.

안그래도 아키바와 실력 차이는 크다. 어차피 그런 차이가 기술적 문제가 생겨서 더욱 커진다 해도 별 의미는 없다.

아키는 DJ 유니트를 조작해가며 플로어에 어떻게 들릴 지를 체크하던 긴카로 시선을 돌린다.

긴카가 두 손으로 크게 동그라미를 만들자 아키도 손을 들어 알았다고 사인을 보냈다.

DJ 부스로 돌아온 긴카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느낌이 좋은데. 역시 새로 도입된 시스템은 다르군”

“아자부가 아니라 시부야에 먼저 도입이 되어서 조금 김 새지만요.”

아키가 빈정거리는 투로 말하자 긴카는 조금 진지한 얼굴로 답한다.

“아키, 이번 예선 아마 우리가 이길 거야.”

“당연한 일이어요.”

“하지만 본선에서는 시부야한테 질 거야.”

“엇…….”

갑자기 패배를 예고하자 아키는 당혹감을 금치 못한다.

“어째서 지금 그런 소리를 하셔요?! 저한테 어떤 억하심정이 있으시길래 이러시죠?”

“나는 너에게 상냥하게 말해주고 있는 거야.”

“어디가 상냥한 건지 하나도 모르겠는걸요!”

흥분한 나머지 아키의 눈동자가 글썽거린다.

“긴카는 항상 그런 식이어요. 저를 홀려 놓고선 그 뒤에 놀려요. 긴카의 진심을 저는 도무지 모르겠어요. 제가 이렇게…….”

아키가 분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내 진심이라…….”

긴카는 숨을 한번 쉬고는 말했다.

“상냥하게 대하기만 하면 네게 도움이 되지 않아. 나는 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할 거야.”

“그런 거면 시부야를 이길 방법을 생각해 보시든가요!”

“알았어. 이제 그렇게 할게.”

“뭐라고요?”

진솔하게 대답하자 아키가 맥이 빠졌다.

“역시 저 놀리고 계신 거죠? 긴카는 언제나 본심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잖아요.”

“날카롭네.”

긴카는 쓴웃음을 지으며 뺨을 긁었다. 그러더니 진지한 얼굴로 표정을 싹 바꾼다.

“하지만, 진심이야.”

아키의 가슴이 쿵, 하고 뛰었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할 것인가, 그 선택을 네가 해 주기를 바랐어. 아키는 시부야를 이기는 것이 최우선이겠지.”

“예에……. 다시 말해서 아자부가 정점에 오르는 것이어요. 그러면 아자부가 문화적으로 평가될 것이고, 자산 가치도 더욱 커질 테지요.”

“알았어. 이렇게 된 김에 하나 더 물어보겠는데.”

“뭔데요?”

“……처음부터 궁금했는데, 왜 덴온부였어?”

아키가 미간을 찌푸린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자산 가치를 올리기만 하는 거라면 조금 더 쉬운 다른 수단이 많았을 터야. 설령 음악으로 자산 가치를 올린다 한들 아키가 직접 덴온부를 이끌 필요는 없지. 이런 선택을 한 근거는 뭐야?”

“그건…….”

아키는 말을 잇지 못한다.

긴카와 이어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단지 그런 이유 뿐이었다.

여러가지 이론으로 무장해 봤자, 그 끝을 따라가 보면 이것뿐이다.

미나토 시로카네 여학원에 다니는 학생들은 모두 시로카네 집안과 어떠한 형태든 경제적으로 엮여있다.

하지만 단 한 명, 예외가 있다.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온 하이지마 긴카.

아버님이 저명한 DJ이면서 뮤지션이자 프로듀서다.

하이지마 집안은 문화적으로 높이 평가받아 아자부의 명가가 되었지만, 경제적으로는 독립성을 지키고 있다. 다시 말해 시로카네 집안과 아무런 접점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 긴카는 자신의 곁에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긴카와 어떻게든 접점을 만들고 싶다.

이어지고 싶었다.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사이가 되고 싶었다.

여러가지 거창한 이유를 둘러대곤 했지만, 결국엔 그것 뿐이다.

첫사랑이었다.

그 첫사랑은 긴카가 사실은 여자란 사실을 알자마자 부서져 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긴카는 쭉 곁에 머물러 주었다.

자신과 긴카의 관계를 뭐라 표현해야 할까?

그리고, 이 관계가 어느 쪽으로 나아가면 좋을까?

자신조차도 자신이 어떤지 알지 못한다.

사람 보는 눈 하나는 확실할 터였다.

그럼에도 자신을 바라볼 때는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하다. 마치 깊은 생각에 갇혀 냉정하게 판단하지 못하게 된 어리석은 사람같다.

그렇게 긴카와의 관계도 알 수 없다.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터인데, 역시 안개처럼 종잡을 수 없이 흩어져 버리기만 한다.

이렇게 내가 원하고 있음에도.

어쩌면 사람은 제일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할 운명일지도 모른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제 막 도착했습니다!”

타마가 모자를 눌러 쓰며 달려온다.

갑자기 현실로 돌아온 아키는 머리를 싸맸다.

“정말이지……. 메이드가 주인보다 늦게 오면 어쩌잔 겁니까. 월급을 10% 까겠어요.”

“으갸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것만은!! 그것만은 용서해 주시지 말입니다아아아아아아아아!!”

슬라이딩 하며 무릎 꿇고 절하는 것이 아주 막힘없는 움직임이었다.

“하아……. 뭐 좋아요, 타마. 오늘 시합 혹시나 지기라도 한다면 해고니까! 시합에 똑바로 임하도록 하세요!”

실제로 계약 조건에 그런 조항이 있었다.

STACK 배틀에서 패배할 때 일방적으로 고용 관계가 종료될 수 있다는 조항이다.

타마는 STACK 배틀에서 져 본 적이 없다. 배틀에서는 반드시 이기므로 그 조항 하나만은 자신있었다.

그러니까 그 조건은,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네엡! 맡겨만 주십쇼!!”

기운 넘치게 대답한 타마 뒤에서 레이나가 말을 걸어왔다.

“저기……. 아자부 여러분. 오늘 대전 잘 부탁드립니다!”

어느새 아키바 세 사람이 아자부 DJ 부스에 와 있었다. 레이나가 대표로 인사하자 다른 두 사람도 고개를 숙인다.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그건 그렇고……. 무슨 트러블이 있었나요? 스탭들과 실랑이가 조금 있었던 모양인걸요.”

레이나가 당황해서 두 손과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뇨, 들고 온 기재재가 잠깐 연결이 되지 않았어서요……. 그래도 지금은 해결했어요.”

“오호? 너희들도 직접 기자재를 가지고 들어오나보군?”

“네, 그게…….”

레이나가 대답을 채 마치기 전에 타마가 끼어들었다.

“핫! 그래봤자 가난한 사람들이 쓰는 장비일테니 말입니다. 아무튼 오래되고 꾸질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걸 살펴보느니 저희 아자부에서 가져온 장비들을 둘러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타마가 자랑스럽게 DJ 유니트 주변에 놓인 기자재로 손을 뻗었다.

“우와! 대단해. 뭐야 이거?!”

손잡이나 버튼이 많이 달린 기계들이 잔뜩 늘어서 있다.

“디제잉에 쓰기 위해 제작한 리듬 머신과 이펙터, 샘플러, 루프 머신들입니다. 전에는 이런 건 꿈도 못 꿀 일이었지만, 아키 님이 사 주셨지 말입니다!”

“우와……. 멋있어! 타마 쨩은 이런 거 자유자재로 다루나보네! 굉장하다!!”

레이나가 솔직하게 감탄하자 타마는 더욱 들떠 계속 자랑한다.

“기성품 같아 보이지만 실은 전부 특별히 커스텀 제작한 물건들입니다! 타마 취향으로 세심하게 세팅해 놓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세트를 잘 다룰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시로카네 집안이 자랑하는 슈퍼 메이드이자 최강 디제”

“타마, 그쯤 해 두세요.”

“……예.”

아키가 재촉하자 타마는 부뚜막에서 내려온 고양이처럼 얌전해졌다.

“그러면 건투를 빌지요. 쉽사리 이겨버리면 재미없으니까요.”

아키는 얼굴에 생각을 잔뜩 담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랬다간 당신들을 밀어준 사람들도 실망할테고요.”

“밀어준…… 사람이요?”

“아니오. 아무것도 아니어요. 그럼 이만…….”

“저, 그게, 아키 씨. 전에 질문해주신 부분 말인데요.”

“질문이요? 아…….”

거의 잊어버릴 뻔 했다. 자질구레한 기억 속에서 겨우 끄집어냈다.

“그런 이야기도 했었지요. 답은 찾아내셨나요?”

“네. 그치만 그 대답은 디제잉으로 들려드릴게요.”

“……그렇군요. 기대하겠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어쩜 저렇게 건방질까, 그런 생각이다.

‘철저하게 때려눕혀 보내드릴테니까요.’

그 대단하다던 호오 카린도 사람 보는 눈이 어지간히 없나요. 어쩌면 그냥 아자부를 놀려 먹기 위해 이러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어느 쪽이든 이렇게 나오면 더욱 급이 다르다는걸 보여줘야겠어요.

아키는 승부욕으로 불타 올랐다.


첫 배틀 대전표는 하이지마 긴카 vs 시노노메 카즈네.

카즈네는 플레이리스트와 트랜지션을 미리 정해 오는 타입. 그 뒤로 반복해서 연습해 DJ 플레이를 완벽하게 완성해 오는 스타일이다.

“역시 좀 긴장되는걸…….”

눈에 넣은 AR 콘택트렌즈 덕분에 현실에는 아무도 없을 콜로세움의 넓은 필드가 사람들로 가득 차 보인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배틀을 지켜보는지 실감이 간다.

게다가 그 상대는 바로 그 아자부의 하이지마 긴카. 대충 생각해 봐도 도무지 이길 만한 상대가 아니다.

하지만 길고 짧은 건 대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돼!

이번에는 시작할 때 임팩트 있는 반전도 생각해 왔다. 우선 눅눅한 인트로로 시작해서 방심시키고는 갑자기 신나는 게임 음악으로 마음을 사로잡을 계획이다.

연습한 대로 플레이 시작.

볼륨 페이더를 단숨에 올렸다. 해냈어.

좋아! 할 수 있어!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도 궁금했다. 당연히 평소대로 왕도 하우스를 내세운 아자부 스타일이겠거니. 귀신같이 테크니컬한 플레이만 골라서 해낼 게 뻔하다.

그랬을텐데

아자부 쪽 플로어에 있는 손님들의 동향이 수상쩍다.

들으면 기가 꺾일 것 같지만, 호기심이 걱정보다 앞섰다.

카즈네는 헤드폰 한쪽만 채널을 돌려 아자부에서 나오는 소리를 모니터링했다.

“?!”

녹진한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하이지마 긴카는 평소 자신을 가리킬 때 일반적으로 남성이 사용하는 보쿠(僕)를 사용하나, 여성이나 어린이가 주로 사용하는 와타시(わたし)를 사용할 때가 있다. 긴카가 1인칭 표현을 다르게 말할 때는 고딕체나 굵은 글씨로 강조한다.

잿빛 내 마음 보듬어 끌어안아
겁이 많은 나 자신을 인정하고
의 진심을 언젠간 모두 다 보여줄게

튕기듯 옆을 보니 긴카가 마이크를 들고 노래하고 있었다.

느린 발라드 노래. 예쁘지만 아자부 스타일은 아닌걸.

왕도 하우스는 어디 간 거야?

아니야. 진정해. 내 인트로도 저렇게 눅눅하긴 마찬가지였잖아. 이제부터 마음 잡고 제대로 해 보자고.

카즈네는 무난하게 다음 트랙으로 전환해냈고 다시 긴카가 디제잉하는 것을 모니터링했다.

이번에는 유난히 그리운 소리가 들려온다.

‘80년대 시티팝?!’

카즈네는 입에 거품을 물고는 아키바 팀 무전으로 채널을 돌렸다.

“잠깐만 레이나?! 하이지마 긴카 좀 이상하지 않아?!”

“으, 응. 무슨 일이 있는걸까…….”

아자부가 주력으로 하는 장르가 아니다. 통일감조차 없다. 빈말로도 능숙한 플레이라 하지 못한다. 하지만 본인은 유별나게 신이 나 즐기고 있는 모양이다.

“이거 무슨 비밀 커맨드 넣는 거야?! Iris에 버그가 있어서 특정 조합으로 선곡하면 점수복사 버그가 생긴다거나 그런 거냐고?!”

“아, 아무튼 카즈네 쨩은 신경쓰지 마! 지금 잘 플레이하고 있어!”

“그 말이 맞아. 내 플레이에 집중해야지!”

카즈네는 한번 심호흡을 하고는 오리지널 트랙인 ‘Mani Mani’를 로드시킨다.

여기서부터는 제대로 분위기 띄우는거야!

한편 긴카가 끼고 있는 이어폰에 아키가 호통치고 있다.

“긴카! 도대체 뭘 하는 거예요?!”

“뭐냐니. 디제잉이지.”

“그런 건 디제잉이라 부르기도 민망해요! 그냥 아무 노래나 틀고 있는 거 아니어요!”

“아무 노래나 트는 게 아니야. 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라고. 그리고 간만에 디제잉 하니까 즐겁기도 해서 말이지.”

“……윽!”

“있잖아, 아키. 진심으로 시부야를 이기고 싶으면, 그렇게 해서는 힘든 거 알지?”

“당연하지요! 그런데 그게 하고 계신 플레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우리에겐 파괴적 혁신이 필요해.”

“그렇게 자포자기 해봤자 부질없는 짓이라고요!”

“우린 여러가지 제약에 얽혀 있어. 이 세상의 속박에, 짊어진 역할에, 경제적 이해관계에. 그런 것들 중에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일도 많아. 하물며 자기 마음 정도는 마음대로 해도 괜찮지 않겠어?”

“긴카…….”

“우리는 계속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찾고 있었어. 시부야란 벽을 뛰어넘기 위해서, 너와 나 사이에 세워진 벽을 느끼면서……. 그러니 한번 이것들을 재구성할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어. 아자부가 해 오던 스타일도, 너와 맺고 있는 관계도.”

“싫어요!!”

아키가 고함이 긴카의 고막 속에서 울린다.

“그 말은, 이 자리에서 우리 관계를 무너트리겠다는 말 아니어요?!”

“아키?”

“그야 긴카와 저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금전적인 계약 같은 건 하나도 없어요! 당신과 저 사이는 마치 거미줄처럼 희미할 뿐이어요. 한번 망가져 버리면 다시는 원래대로 돌려내지 못할 거예요! 우리는 영원히 헤어지지…….”

긴카는 귓속에 윙윙 울려 퍼지는 울부짖음을 정겹게 느꼈다.

“아키는 바보구나.”

“무슨 소리예요?! 그런 말 말고는 할 말이 없어요?”

“너와 나는 아무것도 속박된 게 없으면서도 이렇게 함께 있잖아. 그게 돈이나 계약보다도 더 강한 사이로 묶여 있다는 거 아니야?”

“……….”

아키에게서 대답을 기다리고만 있으면 지금 틀고 있는 노래에서 끊겨 버릴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30초 남았고 다음 곡을 고르는 데 5초, 로딩하는 데 15초, 노래 앞부분을 꺼내 오는데 5초……. 여유롭다.

DJ 유니트에서 트랙을 찾는 도중에, 아키가 갸냘프게 묻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물론이지. 그러니까 잘 봐.”

의 진심을.’

어쩌면 너는 당황할지도 몰라.

그 다음 긴카가 걸어놓은 노래는 느릿한 템포로 다양한 음악 장르가 섞인 오리지널 트랙이었다.

I know something’s broken,
then your feel in the darkness
I’ll find a lights, just for your broken heart
눈을 감고 있는 그대에게 보이도록

여태까지 아자부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사운드다.

매우 신선하면서도 편안하게 다가오는 노래다.

아키와 스탭들, 청중들이 놀람과 동시에 즐거워하고 있다.

흐름이고 나발이고 없이 자유분방하게.

아아. 나는 참으로 자유롭다.

나에게 이런 가능성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지금부터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부족한 점을 찾기만 하던 나 자신이 바보같다.

부족한 점은 어디에도 없었다.

전부 다 내 안에 있던 거였어.

그 사실을 알아내고야 말았어.

계속 마주할 수 있을까.

단지 그것뿐이다.

플로어에 있는 아키바 소속 히다카 레이나가 눈에 들어온다.

나를 바라보며 신나게 춤을 추고 있어.

어쩌면 자유로운 발상을 떠올릴 수 있었던 건, 저 아이에게서 영향을 받은 걸지도 몰라.

히다카 레이나.

그 전설 속 DJ, 히다카 레이아의 딸.

아버지가 일부러 언급한 건 이 아이에게 뭔가 있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호오 카린도 무엇인가 느낀 게 있다.

그리고 자신까지도.

“좋네. 재미있어졌다.”

조심스럽게 마이크를 잡고는 곡에 맞춰 노래한다.

녹진하게, 섹시하게.

때로는 의미심장하면서도 이상한 멋진 모습을.

때로는 내 안에 숨어 있는 소녀를 일깨워서.

아아, 이왕이면 여자애처럼 옷을 입고 올걸.

분명 모두가 원하는 나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긴카.”

어느새 DJ 부스에 아키가 와 있었다.

“좀 이르지 않아? 교대할 때까지 2분 15초나 남았는데.”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쉰 아키는 DJ 유니트 앞에 선다.

“이제 여흥은 다 끝났어요.”

하기사 이제 긴카가 할 일은 없다. 순순히 자리를 내 준다.

“정말 이렇게 해도 괜찮을까요?”

아키가 불안해하며 중얼거린다.

“적어도 우리가 펼쳐 나갈 미래는 더욱 넓어질 거야.”

“하지만 오늘은 질 것 같아요.”

긴카가 따뜻하게 웃으면서

“비록 오늘 잿더미를 본다 한들, 내일은 더욱 빛나기 위하여.하이지마 긴카의 성(姓)에 재 회(灰)자가 들어있고, 아키의 이름으로 빛날 황(煌)자를 쓰고 있음을 이용한 말장난

그렇게 말하며 아키로부터 등을 돌린다.

“긴카.”

무대를 내려가던 긴카가 걸음을 멈춘다.

“귀여웠어요.”

“……그래.”

긴카는 뒤도 안 돌아보고 곧장 무대를 내려간다.

분명 풀어진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겠지.

“정말로…….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있잖아요.”

아키는 자신도 모르게 문득 웃어버렸다.

이제 아키가 DJ 부스에서 자신을 마주할 차례가 되었다.

플로어 위에 떠 있는 홀로그램에 방금 한 배틀 결과가 떴다.

당연하게도 아키바의 승리다.

그 아키바의 2번 타자는 저 마음 약해 보이는 카야노 후타바.

“후에에……. 역시 경기장은 넓네요……. 하지만 손님은 한 분도 계시지 않아서 왠지 마음이 편해져요…….”

배시시 웃으며 플레이를 시작했다.

아키도 크게 신경쓰지 않고 긴카가 놓고 간 마지막 곡 결말부에 걸쳐 가며 무난한 선곡으로 시작했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선율과 품격이 느껴지는 고상한 셀렉션. 차분한 분위기로 평소 아자부가 해내는 플레이.

이런 선택지라면 오늘은 확실히 이길 수 있겠죠.

하지만 이 다음에, 시부야와 할 때는?

싸움에 이렇게 임해서야, 언제 시부야를 이겨볼 수나 있을까요?

“……윽.”

마음속에서 또 다른 자신이 의문을 가진다.

하지만 아자부를 지배하고 있는 아버지 세대는 옛 스타일을 더 좋아해요. 스폰서로부터 지지를 얻으려면 그쪽에 맞춰 줄 필요가 있어요.

정해진 레일 위를 달리면 기대 그 이상 성과를 낼 수 있는 거예요.

아자부는 이런 스타일로 오를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요?

조금 전 긴카가 했던 플레이가 아키의 머릿속에서 다시 재생된다.

형편없어요.

하지만 긴카, 정말 멋져 보여요.

그러고 문득, 타마가 시로카네에서 처음 플레이했을 때를 떠올린다.

그 당시 학생들의 반응.

학생들은 분별 없이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하지만 타마의 감각 자체는 엉성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키는 그 이후로 타마에게 아자부 스타일을 밀어붙였다.

새로운 음악을 접한 학생들은 정말 좋아했었는데요.

저는 여태 우리가 가진 것을 부수면 안 된다 생각하고 있었어요.

만약 긴카와 저 사이가 참으로 강하다면, 이 사이가 부수려 해도 결코 깨어지지 않는 관계라면

“저도…… 좀 더 어리광을 부려도 괜찮겠죠?”

DJ 유니트에 띄운 선곡 리스트에서 몰래 만들어둔 트랙을 선택한다.

어쩔까 망설이다보니 왠지 아키바쪽 소리를 들어보고 싶어졌다.

“어?”

헤드폰 너머로 들려온 것은 아이돌 송. 긴카가 틀었던 80~90년대 물건이 아니라 요즘 아이돌 송이다.

후타바는 얼굴에 웃음꽃을 잔뜩 피우고 편안한 모습으로 디제잉을 이어가고 있다.

그와는 반대로 아키바 쪽 카즈네와 레이나는 안색이 좋지 못하다.

“후타바……. 어떻게 된 거야? 인격이 하나도 바뀌지 않았는데.”

“혹시……. 아까 후타바 쨩, 렌즈 끼는 거 무섭다고 하지 않았어?”

카즈네는 식겁했다.

“아 맞다아아아아아아아아아!!”

절망어린 비명이 울려퍼진다.

후타바에게는 지금 이 공연장에 있는 인터넷 청중이 보이지 않아.

정말로 아무도 없는 곳에서 플레이할 계획이었다.

아키도 평소와 다르게 썩 칭찬할 만한 플레이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걸 감안해도 후타바의 플레이가 영 좋지 않게 들리는 건 매한가지다.

하지만 상대 아키에게는 조금 다르게 들린다.

아이돌 송 플레이리스트라니, 마치 긴카가 하던 플레이를 계속 이어가는 흐름이 아닌가.

“…….”

가슴속에서 주체할 수 없이 질투심이 끓어오른다.

아키는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무리수를 두어가며 컷 인을 하고는 다음 트랙을 끼워넣었다.

긴카의 첫 번째는 바로 저니까요!!

쑥쓰러움따위 숨기려 해 봤자
음악 앞에서는 숨길 수가 없죠
흥겨움 같은 것 안 참아내도 돼요, 그럼
춤을 춥시다

마이크를 쥐고 노래한다.

거기에 안무까지.

언제나 해 오던 것처럼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거드름을 피우는 어른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그저 귀엽기만 한 사람으로.

정신을 차려 보니 타마가 아연실색한 얼굴로 DJ 부스 앞에 와 있다.

“………….”

그 순간 아키는 원상태로 돌아갔다. 부끄러움이 맹렬히 타오르고 치밀어 올라 도망치듯 부랴부랴 스테이지를 내려간다.

그 앞에서는 긴카가 기다리고 있었다.

“최고였어.”

“어디가.”

“다시 사랑에 빠질 뻔 했지 뭐야.”

“……헛?!”

배실배실 웃고 있는 긴카를 보고는 어리석게도 뺨이 달아오른다.

“하, 하여튼……. 농담은 그만 해 주시겠어요? 그건 그렇고요, 모처럼 출혈이 컸잖아요. 그러니까 시부야를 이겨서 찾아내고 말자고요! 새로운 우리 스타일을 말예”

“아……. 그래도 방금은 아키가 이긴 것 같아.”

“예?! 거짓말!!!”

결국 후타바는 피버가 터지지 않은 채 평화롭게 플레이를 마쳤다. 따라서 스코어는 아키의 승리.

이렇게 아자부와 아키바는 1대 1로 동점. 이제 있을 타마 vs 레이나로 승부가 갈릴 것이다.

“이게 웬일……이야. 출혈이라 할 것도 없네.”

하지만 아키는 잔뜩 구겨진 얼굴을 하고 있다.

“저는 출혈이 엄청 컸거든요!”

다시 생각해보니 더욱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부끄러워진다. 플레이했던 건 동영상으로 박제되어 버린다. 안무까지 춰 가면서 라이브한 건 너무한 거 아니었을까, 격하게 후회했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 에이스가 싸우는 모습을 감상해 보실까. 제대로만 해 내면 여기서 이길 수 있을 거야.”

“그렇지요……. 그래도.”

아키는 스테이지 위에 서 있는 타마를 바라보았다.

“타마도 자유롭게 플레이해 주었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말해 준 거 맞지?”

“아.”

무전으로 연락하려 했지만 타마가 스위치를 끈 모양인지 연결이 되지 않았다.

스테이지 위엔 타마와 레이나가 서로 노려보고 있다.

“들을 여유가 있을런지 모르겠다만 들어보는 게 좋겠지 말입니다! 롯폰기의 바에서 온 블랙 캣! 아자부 최강 메이드 DJ! 쿠로가네 타마의 솜씨를 말입니다!”

“우와~. 멋있어! 이렇게 둘이서 서 있으니까, 애니에서 보던 주인공이랑 라이벌이 싸우는 모습이 뇌리에 스쳐서 가슴이 웅장해진다!”

“갑자기 애니메이션은 왜 찾습니까?! 오타쿠 냄새 나지 말입니다!”

그런 실없는 대화를 하면서 서로 첫 곡을 시작한다.

타마는 아자부 취향인 모노 하우스 노래를, 한편 레이나는 퓨처 팝.

타마는 여유롭게 웃음을 머금는다.

레이나가 어떻게 플레이하는지는 이미 조사해 놓았습니다. 기본적으로 타마처럼 플로어에 있는 청중을 위해 플레이하는 타입입니다.

확실히 잘하고, 독특한 센스가 느껴지긴 합니다. 하지만 제가 더 앞서 있습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디제잉 해 왔는지에 따라 경력 차이가 있을 겁니다.

까탈스러운 손님들이 휘두르는 갑질 응대도 벌써 10년 가까이 했습지요. 그런 손놈들 하는 짓거리 생각하면 아키 님은 그냥 귀여울 정도지 말입니다.

오늘 온 관객들은 특별히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인기라면 아자부가 한 수 위입니다. 아자부쪽 단골 손님이 더 많을 겁니다.

나머지 관객들은 Iris 주최측과 스탭들이지만, 이쪽은 공정하게 판단해 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분명 음악 장르로 문제가 될 일은 없습니다.

각자 스타일로 해내면 스킬이 높은 제가 이깁니다.

아키바에 승산이 있다면 두 가지가 있겠습니다. 첫번째는 직원들의 취향을 간파해내는 경우. 하지만 시로카네 가문 메이드 정보망으로 조사해보니 그럴 가능성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두 번째, 아자부가 올라선 링에 아키바가 뛰어들어 진지하게 승부를 벌여 이기는 경우.

하지만 그러면 각자 가진 스타일로 승부하는 쪽보다 힘들겠습니다.

어떻게 되든 저희가 이길거란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타마는 배시시 웃는다.

아무튼, 이쪽도 처우가 걸린 문제이지 말입니다.

졌다가는 모가지, 하지만 이기면 특별 보너스가 나올지도 모릅니다.

“이러니 괜히 힘이 들어가지 말입니다?”

아키바 쪽 DJ 부스를 보니 레이나가 본 적 없는 원반을 이쪽으로 들어 보이고 있다.

“……?”

세밀한 홈이 패어 있는 검은 원판.

레이나가 그것을 양손에 끼고는 빙글빙글 돌리며 방긋 웃음짓는다.

“?!”

타마는 입이 헤벌레 벌어졌다.

‘바이닐?!’

이른바 아날로그 레코드라 불리는 물건.

이미 끝나버린 저장 매체다. 몇 차례 레트로 붐이 일어나긴 했지만, 최근 수십 년 동안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어째서 저런 물건을…….”

이제는 정말 레트로 취미밖에 안 되는 물건이다. 지금은 DJ 유니트와 Iris 데이터베이스만 있으면 충분하다. 더 필요한 물건이라면 아키가 구해 준 샘플과 루프, 이펙트를 보강할 장비 정도밖에 없다.

“저런 유물을 들고 와서는 뭘 할 생각인 겁니까……. 거기다가 플레이어까지~?!”

DJ 유니트 양쪽에 턴테이블이 놓여 있다. 수십 년 전까지 사실상 표준처럼 사용되던 명기다.

DJ 부스를 올려다 보던 아키도 입을 반쯤 벌리고는 어쩔 줄 몰랐다.

“아까 스탭과 실랑이가 있었던 게, 저걸 연결하려고……?”

그 옆에서 긴카가 눈을 반짝였다.

“정말 재미있잖아……. 히다카 레이나.”

레이나는 레코드 위에 바늘을 떨어트렸다. 한 귀로 소리를 들으면서 피치를 조정하고, 자신의 귀와 리듬감만으로 BPM을 맞춰 낸다.

그리고는 레코드를 손으로 더듬어 가며 시작할 부분을 찾아낸다. 손가락을 떼고 시작하자 이퀄라이저와 페이더를 움직였다.

“당췌 뭔 짓을 하려고 그러십니까…….”

타마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아키바 쪽 소리를 모니터링했다.

그 순간 레이나가 단번에 페이더를 꺾어 노래를 바꾼다.

“……윽?!?!?!”

타마가 눈을 부릅뜬다. 동공이 작아진다.

바로 BABEL에서 타마가 레이나에게 들려 줬던 그 노래.

그 잡동사니 믹스테이프에 들어가 있던, 타마가 정말 좋아하는 노래.

“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차마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어떻게 찾았어요?! 어디 있었어요?! 노래 제목은요, 뮤지션은요?! 그 데이터 저한테 좀 보내주시지 말입니다!!

그런 마음의 소리를 들어낸 것처럼, 레이나는 재킷을 들어 타마에게 보여 주었다.

히다카 모형점 지하에 있던, 레이아의 창고에서 꺼낸 레코드였다.

그것만 가져온 게 아니다. 레이나는 발 밑에 둔 두랄루민 케이스를 열었고, 그 안에는 레코드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그 중에서 한 장을 골라 뽑아낸다.

“나도 어릴 적부터 턴테이블을 좀 돌려 봤거든? 아버지 컬렉션이라면 다 들어 봤으니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고.”

그 다음 노래는 한 시대를 풍미한 유로비트 중에서도 불후의 명곡.

“끄……윽!”

타마가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얼떨결에 춤을 추게 만드는 명곡. 심지어 그걸 짜임새 있게 틀고 있다. 그게 너무 분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리 자체가 좋아.

스펙으로 따지자면 최신 기자재 쪽이 소리가 더 좋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딘가 귀에 감기는 것이, 뭐라 표현할 수 없어 미쳐버린다.

타마는 눈빛이 바뀌었다.

“아주 훌륭합니다.”

스스로 기합을 넣듯 모자를 다시 썼다.

“그대로 받아쳐 드리겠지 말입니다!!”

타마는 Iris 데이터베이스에서 자신있는 유로비트 목록을 불러왔다.

거기다 아키가 사 준 루프 머신으로 대담한 베이스와 격한 리듬을 담은 루프를 찍어냈다.

우아한 아자부 음악 아래에서 치안이 나쁜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레이나는 그 순간 타마와 이어짐을 느꼈다.

음악이 있으면 이어질 수 있어.

돈도 계약도 필요 없어.

그냥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서, 서로 좋아할 것 같은 곡을 추천해 주고, 재미있게 믹스해 내면 그것 만으로도 관계를 맺을 수 있어. 서로 이해할 수 있어. 친해질 수 있어. 친구가 될 수 있어.

소리로 자신을 전할 수 있어.

그러니까 DJ는, 대단해!

레이나는 텐션이 올라간다.

언니하고는 지금 아무것도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음악으로 대화한다면 분명 이어질 수 있어.

하라주쿠 친구들하고도, 타마 쨩하고도 이렇게 서로 마음을 주고받고 있잖아. 그러니 할 수 있어!

그 때, 타마가 마이크를 잡았다.

고동치는 심장
풀 가동하는 전두엽
기분은 쭉쭉
욕망 리미터 해방
전망은 양호
압도적 승기 농후
그 기세로 플로우에 올라 타

‘랩?!’

그런 전개가 펼쳐지자, 레이나는 몸이 떨렸다.

가슴 깊은 곳에서 소름이 끼쳐 온다.

깜짝 놀라 타마를 바라보니 이겼다는 듯 배시시 웃음을 지어보인다.

“저 유로비트만 있는게 아니지 말입니다! 손님들의 요구에 맞춰 온 경력은 상상 초월입니다!”

타마는 여러 장르를 종횡무진하며 자유자재로 드롭을 만들어 간다.

“역시 대단해…… 타마 쨩.”

레이나도 입가에 절로 웃음이 피었다.

“한번 제대로 놀아 보자!!”

레이나는 레코드 위에 있는 유로비트와 Iris에 올라간 EDM을 즉흥적으로 매쉬업한다.

어느 쪽이든 내가 좋아하는 노래야.

음악에 있어 ‘좋아해’는 잔뜩 있어도 돼.

‘좋아해’를 표현할 방법은 수없이 많고, 그 중에서 정답은 없어.

나는 나만의 ‘좋아해’를 소중히 할래.

그리고 상대가 생각하는 ‘좋아해’를 소중하게 생각할거야.

아키처럼 자신만 제일이고 나머지를 부정하는 태도를 가질 수 있어.

그건 그 사람 나름대로 ‘좋아해’를 표현하는 방법일 거야.

상대를 인정한다 해서 내가 똑같이 행동할 필요는 없지.

사람은 모두 다 다르니까.

사람은 모두 다 다르다는 점을 모두 품어 버리면 돼.

무엇이든 받아들이고 품에 넣어버리면 되는 거야.

그만큼 클럽 뮤직의 세계는 넓으니까.

이곳에 있어서 안 될 음악은 없어.

누구든 머물러도 좋아.

“그래서 나는, 이 자리에서 나 자신으로 있을 수 있어!”

레이나도 온갖 장르 소리를 다 끌어온다.

무럭무럭 끌어올리는 빌드업.

거기서 결정타를 먹일 드롭을 떨군다.

AR 콘택트 렌즈 너머 보이는 관객이 하늘을 뚫을 기세로 불어난다.

물리적으로 존재하지도 않았을 플로어가 흔들린다.


“으으……. 아키 님. 정말 죄송합니다…….”

타마는 아키 앞에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근소한 차이로 레이나에게 져 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적은 차이라 한들 패배는 패배다. 계약상 타마는 잘리게 되는 셈이다.

“지금까지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터벅터벅 걸어나가는 타마에게 아키가 말을 건다.

“어디 가세요?”

“어디긴요……. 졌잖습니까.”

“그렇지요……. 다음 시합에서는 조금 더 노력할 필요가 있겠어요.”

어안이 벙벙한 타마에게 다가간 아키는 봉투를 내밀었다.

“여태까지 했던 플레이를 생각해 봐도 오늘 했던 플레이가 제일 뛰어났어요. 상으로 특별 보너스를 드리겠어요.”

“……예?!”

타마는 촉촉한 눈으로 아키를 올려보았다.

“아키 님…….”

아키는 조금 새침해져서는 뺨을 붉혔다.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도록 하세요. 바로 저를 위해서.”

“예! 아키 님!!”

봉투를 받은 타마는 고개를 홱 돌리고서는 내용물을 확인해 본다.

“우효~옷! 역시 아키님은 두둑하십니다! 허벅지만 두둑하신 게 아니셨습니다! 오늘밤은 이것으로 플렉스 하겠습니다!! 저를 땅꼬마 취급한 레스토랑에서 시로카네 집안의 위상을 제대로 드러내 보이겠습니다!!”

“타마! 쓸데없이 시로카네 집안 이름을 대고 다니는 짓은 그만둬요!! 그리고 몸매 이야기 같은 건 다시는 입에 담지 말도록 하세요!!”

“저…… 아자부 여러분.”

그렇게 말하며 아키바 세 사람이 다가왔다.

히다카 레이나가 곧은 눈동자로 아키를 바라보고 있다.

전에 만났을 때 보았던 불안에 찬 눈동자와는 딴판이었다.

“아키 님께서 하신 질문 말인데요……. 저 나름대로 대답을 또 찾아낸 것 같아요. 저는요”

허나 아키는 가볍게 한 손을 들어 레이나를 제지한다.

“저는 이미 들었어요.”

“네?”

“디제잉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레이나의 얼굴이 해바라기처럼 환해졌다.

“여기서 더 이야기해봤자 분위기만 깨 먹을걸요.”

아키는 반짝거리는 금발을 쓸어넘기고 돌아 무대 언저리로 향한다.

“시부야와 벌일 대결도 기대하겠어요.”

“네, 네엡! 감사합니다!”

레이나가 굽신굽신 고개를 숙였다.

“……레이나.”

카즈네가 레이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레이나가 고개를 들고 보니 이미 아자부 세 사람은 없었다.

“카즈네 쨩, 우리…… 이겨 버렸네.”

“그럼. 이제 시부야와 붙을 수 있어.”

그렇게 카즈네는 웃으며 말하고 있지만, 긴장한 모양인지 조금 어색하다. 어색한 건 후타바도 마찬가지다.

“언니 분과도…… 어떻게 이야기할 기회가 생긴 것 같네요!”

“응. 두 사람 다…… 고마워.”

레이나는 무대 위 DJ 부스를 올려다 보았다.

“다음에는 저기서 언니에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꼭 내 음악을 전해주고 말거야.”


시부야 테이온 국제 학원 덴온부 동아리방은 시부야 역 바로 앞 스크램블 교차로를 마주보는 건물에 있다.

“카린!”

세토 미츠키가 문을 부술 듯한 기세로 뛰어들어온다.

여기는 3층에 있는 동아리방. 원래는 회의 등을 하기 위해 마련한 부원 전용 라운지다.

하지만 지금은 호오 카린이 묵는 자취방이 되어버렸다. DJ 장비들이 빼곡히 늘어서 있고, 케이블이 바닥에 굴러다닌다.

이렇게 장비만 굴러다니면 괜찮을 지도 몰랐지만, 외투도 속옷도 갈아입고 벗어둔 옷도 뱀 허물마냥 어지럽게 늘어져 있고, 잡지와 택배 상자가 널부러진 그런 지저분한 방에 시부야의 제왕께서 통로에 거지같이 누워 계신다.

그런 모습을 미츠키는 꺼림칙하게 내려다 보았다.

“카린! 다음 뉴 레전드 상대가 아키바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어……?”

피곤에 절은 눈을 뜨더니, 카린이 벌떡 일어난다.

“그렇구나……. 아자부한테 이겼나 보네.”

미츠키는 사람 잡는 표정으로 카린을 노려본다.

“당신이 아키바를 밀어줬다 들었어.”

“아 그랬지.”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아무렇게나 머리를 털어낸다.

“좀 재미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다시 말해두는데, 카린. 내 사생활에 멋대로 간섭하지 말아 주겠니.”

“착각하지 마. 나는 네 녀석 가정사 따위는 하나도 관심 없어.”

잠든 짐승이 잠에서 깨어나 늠름한 눈동자가 번쩍 빛난다.

“내가 원하는 건 적이다. 그것도 아주 특출난 적 말이야.”

보통 학생이라면 카린이 노려보는 시선과 마주치기만 해도 눈을 피하거나 도망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미츠키는 정면으로 맞받아친다.

“아키바가 그렇게 강적이란 말이야?”

“그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지.”

카린은 바닥에 널부러진 외투를 주워들더니 어깨에 걸쳤다.

“아침밥 먹으러 다녀올게. 같이 갈래?”

“벌써 해가 중천에 떴거든.”

카린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뀐다.

“나는 누구든지 나를 쓰러트릴 정도로 강한 녀석이라면 아무렴 좋아. 미츠키 네 녀석이든, 루키아든, 네 동생이든 말이지.”

미츠키가 어금니에서 으드득 소리를 낸다.

“아니, 레이나는 손대지 마.”

“아앙?”

의아한 얼굴로 되돌아보자, 카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츠키의 온몸에서 살기가 흘러 넘치고 있다.

원한, 집념, 고집 같은 것이 뭉쳐져 사람 탈을 뒤집어 쓴 것 같다.

“레이나는 내가 처리할거야.”